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프리드리히 파울루스 (문단 편집) == 평가 == 참모차장으로 근무할 때부터 이미 [[프란츠 할더]]의 후임 육군참모총장으로 유력시된 인재였다. 구체적으로 [[국방군최고사령부]](OKW) 총참모장인 [[알프레트 요들]] 상급대장이 동부전선을 비관하는 전황을 연달아 내놓자 이에 격분한 히틀러는 요들의 집무실을 정리하고 수행 장교들도 내보내고서 후임으로 파울루스를 임명하려 했으나, 파울루스는 스탈린그라드에서 나올 수 없었기에 이것은 무산되고 요들은 종전 후까지 유임된다. 제6군 탈출 실패를 파울루스에게 떠넘긴 만슈타인의 회고록 《잃어버린 승리》에 영향받은 냉전 당시의 서방 측 독소전사, 대한민국 밀덕에 큰 영향을 끼친 [[라이프 제2차 세계대전]], 특히 국내에서 august라는 필명으로 인터넷상에서 유명한 비전문가인 남도현의 블로그와 그가 집필한 《2차대전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 순간들 - 프랑스, 태평양, 스탈린그라드》, 《히든 제너럴》, 《히틀러의 장군들》에서는 패전 책임을 모조리 파울루스에게 전가하면서 히틀러의 명령에만 충실한 '돌쇠'로 반복해서 묘사했지만, 이것은 불공정한 편견에 불과하다. 파울루스는 기갑부대 지휘 경험, 실전 경험은 부족했지만 제2차 하르코프 작전에서의 침착한 대응과 [[청색 작전]]에서의 진군으로 스탈린그라드까지 단숨에 도달하는 등 오히려 지휘관으로서 두각을 나타냈고 이것을 인정받아 기사 철십자 훈장을 받고 상급대장으로 진급한다. 여기서 파울루스는 스탈린그라드가 전략상· 경제상 불필요하다고 판단해 일부 병력으로써 스탈린그라드를 포위해 소련군을 고사하게 해 스스로 항복하게끔 할 심산이었다. 6군의 상위 제대인 B집단군 수뇌부도 같은 의견이었다. 그러나 스탈린의 이름을 딴 소련의 대도시를 독일군이 직접 점령하기를 원하던 히틀러의 강압으로 스탈린그라드 시내에 진입하게 된다. 결국 스탈린그라드에서 참패한 책임은 '''"스탈린"'''이라는 이름에 집착한 나머지 판단력을 상실하고 수많은 병력을 투입하고 포위된 후에도 ''''후퇴 불가 현지 사수'''' 명령만 고수한 히틀러의 책임이 가장 크다. 파울루스는 6군 사령관으로서 '기갑 부대는 평지에서의 진군은 유리해도 스탈린그라드 같은 [[시가전]]에는 독일군에게 불리하다'면서 스탈린그라드 진입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파울루스의 직속 상관으로 B집단군 사령관이었던 폰 보크 원수가 히틀러의 명령에 반대했다가 해임되면서 히틀러의 고집을 꺾기는 더욱 어려워졌다. 다만 천왕성 작전까지만 해도 소련군의 예측마저 한참 초월할 정도로 광범위한 영역에 엄청난 수의 독일군+추축군이 포위되어 있던 만큼 포위망의 밀도는 상대적으로 엷었다. 포위망이 처음 완성된 시점에선 6군의 전역 밖에서 벌어졌다는 사정을 감안해야 하지만 전황의 파악과 이에 따른 기민한 대응이 부족했던 점은 파울루스의 책임이다. B집단군 사령관인 [[막시밀리안 폰 바익스]]는 전황에 회의적이었음에도 히틀러에게 적극 반대 의견을 개진하지 않고 총통의 명령을 따랐고, 정작 파울루스에게 패전의 책임과 비난이 집중되면서 오히려 1943년 2월 1일, 폰 바익스는 원수로 진급한다.[* 서열 상으로도 6군 사령관인 파울루스를 원급으로 진급시려면, 직속 상관인 B집단군 사령관 폰 바익스가 원수가 아니면 안 되기도 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막바지에 탈출한 한스-발렌틴 후베 휘하의 기갑 장교들은 '시가전에서 전차가 제 용도를 발휘하지 못한 만큼, 포위망이 초기 완성되었을 때 전차를 시가지에서 빼내어 외부로 돌렸어야 한다'며 파울루스의 결단을 아쉬워했다. 행동형 지휘관이 아니어서인지 파울루스 자신이 '포위망 내의 절반은 내 지휘를 받지 않는다.'고 소련군에 진술할 만큼 부하들을 통솔하고 장악하는 능력은 부족했다.[* 51군단장인 [[발터 폰 자이틀리츠-쿠르츠바흐]]와 파울루스는 마지막까지 대립했다. 파울루스는 항복 직전 폰 자이틀리츠-쿠르츠바흐를 해임했다.] 전임 사령관인 라이헤나우보다 부하들의 복지에 신경 쓰는 지휘관이었지만 오히려 6군 장병들은 파울루스가 격전의 와중에도 매일 옷을 갈아입고 장갑을 늘 끼고 나올 만큼 몸가짐을 단정하게 하는 모습조차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이러한 문제점이 극도에 도달한 상황에서 누적되고 표출되면서 결국 위기 대처 능력 부재로 이어진 셈이다. 안토니 비버교수는 저서인 피의 전투 스탈린그라드에서 뛰어난 참모장교였으나 [[발터 폰 라이헤나우|갑작스러운 상급자의 죽음]]으로 본인의 역량을 벗어난 큰 직책과 임무를 받은 불운한 인물로 평가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